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생애 (문단 편집) == 빈으로 간 모차르트 == 우여곡절 끝에 [[잘츠부르크]]로 복귀했으나 이 곳 사정은 여전히 암울했다. 월급은 좀 올랐지만 콜로레도 [[대주교]]는 여전히 꼰대질을 해댔고(...) 음악환경은 열악했다. [[오페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모차르트는 일종의 외주를 받아서 오페라 작곡을 시도했다. 순회공연단을 위해 오페라 부파였던 '가짜 여정원사'를 독일어 징슈필로 개작하였고, 1779년에는 모처럼 [[프랑크푸르트]]로부터 징슈필 오페라인 차이데(Zaide)를 의뢰받아 작곡했으나 대본에 문제가 많은데다 징슈필 치고는 오페라의 분위기가 너무 어두운 탓에 도중에 포기했다. 이후 상황이 받쳐주지 않아 한동안 잠잠했다가, 이듬해 바이에른-팔츠 선제후 [[카를 테오도어]]가 궁정 카니발에 상연할 목적으로 모차르트에게 오페라 '크레타의 왕 [[이도메네오]](Idomeneo re di Creta, K.366)'를 의뢰하였는데, 이 오페라가 1781년 1월 뮌헨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원래 바이에른 선제후는 전술한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였는데 그가 1777년 말에 후사 없이 사망하자 후계 문제를 두고 [[바이에른 계승 전쟁]]이 벌어졌다. 이후 협상 끝에 황제 선거에서 1표만 행사하는 조건으로 1779년 팔츠 선제후였던 같은 [[비텔스바흐 가문]]의 카를 테오도어가 후임으로 결정되었다.] 이 이도메네오는 모차르트의 후기 오페라들에게 인지도는 밀리지만 그의 음악인생에서는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인데, 이 작품을 계기로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재능과 역량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이도메네오는 이후 모차르트의 오페라에서 드러나는 중요한 특징들을 많이 보여주고 있으며 모차르트 당시 이미 화석화 되어버린 오페라 세리아 장르에서 모처럼 생명력이 넘치는 작품을 탄생시켰다는 점에서 음악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전술했다시피 당시 오페라 세리아는 천편일률적인 스토리에 가수들의 가창 경연대회로 전락한지 오래였다. 하지만 이 이도메네오는 '극과 음악의 일치'라는 선배 작곡가 [[글루크]]의 오페라철학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 진정한 극음악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다만 이 오페라를 공연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당시의 관행에 젖어 있던 가수들이 곡을 멋대로 바꿔 부르거나 배역의 비중을 높여달라는 등의 무리한 요구를 해댔기 때문에 이들을 달래느라 엄청나게 애를 먹었다.] 1781년 3월, 모차르트는 [[신성 로마 제국/역대 황제|신성 로마 제위]]를 계승한 [[요제프 2세]]의 대관식에 자신의 고용주인 콜로레도 [[대주교]]를 따라 참석하게 된다. 여기서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에서 받는 연봉의 절반이 넘는 액수를 제안받고 황제 앞에서 연주하려고 했는데, 콜로레도 대주교가 이를 거부하는 바람에 두 사람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진다. 자신을 하인으로 취급하면서 사사건건 간섭하는 콜로레도 대주교에게 오만 정이 떨어진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로 돌아온 즉시 사표를 제출하는데, 대주교는 이러한 중대한 사안은 아버지랑 논의하고 하는게 자식의 도리가 아니냐며 사표수리를 거부한다. 그러자 모차르트는 제 아버지에 대한 도리는 알아서 할 테니 오지랖 좀 작작 떨라고 대주교에게 말한다. 이를 듣고 화난 대주교는 그의 비서, 아르코 백작을 시켜 그를 내쫓으라고 한다. 즉, 자신의 비서에게 건방진 음악쟁이의 엉덩이를 걷어차게 해서 내쫓아 버린 것. 정말로 말 그대로 엉덩이를 차서 내쫓아 버렸다.[* 당시 잘츠부르크에는 [[요제프 하이든]]의 친동생 미하엘 하이든이 있었기 때문에, 콜로레도 대주교는 건방지고 다루기 힘들었던 모차르트의 부재를 딱히 아쉬워하지 않았다.] 이 일로 모차르트는 아버지와도 사이가 벌어지는데, 모차르트가 계속 떠돌이 인생으로 살기보다는 수준에 좀 안 맞더라도 당분간 잘츠부르크에 안정적으로 지내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물론 혈기 넘치는 25세의 청년이 아버지의 바램대로 움직일 리는 없었으며, 일단 사직한 후 지체없이 빈으로 떠났다.빈에 도착한 모차르트는 더 이상 왕궁이나 지방 귀족들에게 굽실거리면서 자리를 얻으려 하지 않았고, 이 참에 과감하게 프리랜서 작곡가의 길을 선택한다. 잘츠부르크 시절 모차르트의 고용주였던 콜로레도 대주교는 상당수의 미사곡, 디베르티멘토, 교회 소나타 등 작곡에서 기교적인 콜로라투라 아리아나, 카논이나 푸가, 아 카펠라 등의 대위법적 페세지들을 최소로 줄이고 실제 교회 및 궁정 행사에서 사용될 적합한 규격으로, 최대한 간단하면서도 실용적인 형태의 작곡을 요구하였다. 미사곡의 길이도 실제 교회 예배에서 사용에 적합한 20분 이하로 맞출것을 주문하였는데 당시 모차르트의 상당수의 미사 브레비스(Missa Brevis)곡들은 이런 요구에 부합하여 작곡된것이다. "미사 브레비스"는 우리말로 번역하면 "간결한 미사"인데 통상전례문(Mass of the Ordinary) 형식의 미사 악장들, Kyrie, Gloria, Credo, Sanctus, Benedictus, Agnus Dei이 각각 2분~4분 내의 짧은 길이로 작곡되는게 실용성을 강조한 이러한 미사 브레비스 악곡의 특징이다. 결국 콜로레도 대주교의 이러한 요구들은 모차르트가 자신의 재능을 펼칠 범위를 최대한 제한한 것이다. 대담한 화성의 사용도 금하였는데, 이것은 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미켈란젤로]]에게 [[https://www.youtube.com/watch?v=V64Wv9_wW8o&t=1m30s|한정된 물감과 미술 재료만 가지고 그림을 그리라는 요구에 비유될수있었다.]] 모차르트는 이러한 대주교의 요구에 맞춰 많은 미사 브레비스 곡들을 최대한 단순한 조성인 C장조로 작곡하였으나 실제 곡 내에선 대주교의 꼰대성을 비꼬는 듯한 익살스럽고도 복잡한 화성을 자세하게 들으면 눈치챌수있을 정도로 조금씩 사용하였고, 실제 연주에서 대주교가 [[https://www.youtube.com/watch?v=V64Wv9_wW8o&t=9m30s|"엥? 뭐임?"거릴 상황을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이러한 미사 형식에선 복잡한 [[대위법]]의 사용도 지양되는데, 가령 [[푸가]]로 Cum Sanctu Spiritu나 Et Vitam Venturi 따위의 짧은 메세지의 가사를 [[돌림노래]]처럼 여러 성부에서 엇갈리게 부르는 페세지를 넣으면 실제 통상전례문 미사곡의 가사가 커버해야될 한정된 곡 분량을 너무 많이 잡아먹는다는게 이유였다. 잘츠부르크는 제대로된 규모의 오페라 하우스도 없는 시골도시였다. 여러 분야에서 자신의 재능을 맘껏 펼쳐보이고 싶은 모차르트를 가두기엔 너무나도 좁은 우물이였던것이다. 모차르트가 '''전업 작곡가'''라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직종"의 창시자에 가깝다는 사실은 사회사(혹은 역사사회학) 및 예술사적으로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전업 작곡가 이전의 '''"음악가"'''들이 거의 궁정악사, 악장이나 교회 전속 음악가[* [[미사]] 또는 [[예배]]음악, 장례음악 등 담당]로 직업이 협소하게 정해져 있었던 반면[* 직업이 협소하다는 것은 '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좁게 정해져 있었다는 얘기다. 그 범위를 벗어나면 심하게는 처벌 또는 사형당할 수도 있었으나, 모두가 알다시피 개혁군주의 하나로 통하는 요제프 2세의 정책의 영향과 함께 그는 이 모두를 초월하는 음악을 남겼다.], 전업이자 프리랜서가 되면서, 당대의 [[계몽주의]] 사상과 맞물려, 음악의 패러다임이 바뀌기 시작한 현상이자 원인이 되었기 때문. 단적으로 모차르트의 전례가 없었다면, [[베토벤]]의 활동이나 이후 [[슈베르트]]를 위시한 낭만파 음악, 다시 현대음악의 시작인 [[쇤베르크]] 등으로 이어지는 음악의 시대사적 변화가 가능했던 하나의 사회구조적인 요인은 형성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사회구조적인 요인만이 음악의 시대사적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또 한가지 언급해야 할 것은, 흔히 알려진 것처럼 모차르트가 음악 역사상 최초의 프리랜서 작곡가는 아니라는 점이다. 모차르트 이전에도 궁정이나 교회에 소속되지 않고 연주/작곡 의뢰를 받아 생계를 꾸렸던 음악가들은 꽤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헨델]].[* 헨델은 1714년 후원자였던 [[앤 여왕]]이 사망하자 오페라 극장의 창립에 직접 참여했으며, 영국에서 오페라가 몰락한 1730년대 이후 본격 프리랜서 작곡가로 전향해서 다수의 오라토리오와 기악곡을 작곡했다.] 다만 선배 프리랜서 작곡가들과 달리 모차르트의 라이프 스타일은 이후 등장한 수많은 작곡가들의 직접적인 롤모델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여튼 결과만 놓고 보면 모차르트가 프리랜서가 된 것은 모차르트 본인에게도 상당히 성공적인 선택이었으며, 음악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확실하게 꽃을 피웠다.[* 다만 밑에 나와 있다시피 돈 관리를 잘못해서 그 많은 돈을 다 탕진하기는 했다.] 즉 모차르트는 전업 작가의 시조인 동시에 확실한 성공 사례를 제시했던 셈.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